올리브오일과 미식의 기록 · Notes on olive oil & taste
스토리/푸드
스페인 가정의 부엌에서 올리브오일은 단순한 조리용 기름이 아니다. 아침 토스트부터 저녁 스튜까지, 하루 세 끼를 감싸는 이 황금빛 액체가 어떻게 집밥 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는지 살펴본다.

스페인은 세계 최대 올리브오일 생산국이자 소비국 가운데 하나다. 국제올리브협회(IOC) 자료에 따르면 스페인의 연간 올리브오일 생산량은 전 세계 공급의 약 40~45%를 차지하며, 1인당 연간 소비량은 10리터 안팎에 이른다. 한국 평균 소비량이 1리터 미만임을 감안하면, 스페인 가정의 식탁에서 올리브오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압도적인지 실감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숫자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쓰임새의 밀도다. 스페인 가정에서 올리브오일은 '특별한 날의 드레싱'이 아니라 아침 식빵에 두르는 기름이고, 점심 렌틸 스튜를 끓이는 베이스이며, 저녁 구이 채소 위에 마무리로 뿌리는 마지막 손길이다. 하루 세 끼 모두에 등장하는 재료가 올리브오일 말고 또 있을까 싶다.

스페인식 아침의 대표 메뉴는 판토스타다(Pan Tostada)다. 바삭하게 구운 빵 위에 토마토를 문지르고,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오일(이하 EVOO)을 넉넉히 뿌린 뒤 소금 한 꼬집을 얹는 것이 전부다. 재료는 단출하지만 올리브오일의 품질이 맛의 완성도를 결정한다. 안달루시아 지방에서는 이 조합을 '판 콘 토마테이 아세이테(pan con tomate y aceite)'라 부르며, 바르셀로나식 파 암 토마켓(Pa amb tomàquet)과 함께 스페인 아침 문화의 쌍두마차로 꼽힌다.
흥미로운 점은 품종 선택이다. 안달루시아 현지 가정에서는 과일향이 풍부하고 산미가 은은한 오히블랑카 품종 EVOO를 아침 빵에 즐겨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쓴맛과 매운맛이 지나치게 강하지 않아 토마토의 단맛과 어우러지기 좋기 때문이다.
스페인 집밥에서 점심은 하루의 주식이다. 이때 빠지지 않는 조리 기술이 소프리토(Sofrito)다. 양파, 마늘, 토마토를 EVOO에 낮은 불로 천천히 볶아 만드는 이 소스는 파에야, 렌틸콩 수프, 해산물 스튜 등 수십 가지 요리의 토대가 된다.
소프리토를 제대로 만들려면 기름 온도 관리가 핵심이다. 스페인 요리 연구가들은 통상 100~120℃ 안팎의 낮은 온도에서 재료를 서서히 익히는 방식을 권한다. EVOO는 발연점이 품질에 따라 190~210℃ 수준으로 보고된 바 있어(국제올리브협회 가이드라인 참고), 소프리토처럼 중저온 조리에서는 충분한 안정성을 보인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고온 튀김 조리에서의 안정성은 품질과 산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단정하기 이르다.
소프리토 한 냄비가 완성되면 스페인 가정의 주방은 그 주 내내 재사용한다. 밀폐 용기에 넣어 냉장 보관하며 매 끼니의 베이스로 꺼내 쓰는 것이다. 이 실용성이 스페인 집밥에서 EVOO 소비가 자연스럽게 높아지는 이유 중 하나다.

여름 스페인 집밥의 꽃은 냉채 수프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가스파초(Gazpacho)는 토마토, 오이, 피망, 마늘, 식빵, 식초 그리고 EVOO를 함께 갈아 만든다. 여기서 올리브오일은 수프에 농도와 윤기를 더하는 유화제 역할을 하며, 마지막 한 바퀴 두름으로 향을 올린다.
덜 알려졌지만 미식가들 사이에서 더 사랑받는 냉채 수프는 아호블랑코(Ajoblanco)다. 맛살라가(Málaga) 지방이 원조로, 아몬드, 마늘, 빵, 식초, 물 그리고 EVOO만으로 완성되는 흰색 수프다. 강도 높은 피쿠알 품종의 기름보다는 향미가 부드러운 품종이 잘 어울린다고 현지 요리사들은 말한다. 포도나 멜론을 곁들여 내면 EVOO의 풀 향과 과일의 단향이 대비를 이루는 복층 구조의 맛이 완성된다.
스페인의 저녁은 가볍다. 타파스 몇 점, 채소 구이, 치즈 한 조각이 전형적인 구성이다. 이때 EVOO는 '마무리 기름(aceite de acabado)'으로 등장한다. 구운 가지나 호박 위에 실처럼 가늘게 뿌리거나, 흰 강낭콩 요리 위에 두텁게 두르는 방식이다. 이 마무리 기름은 조리 중에 쓰는 기름과 별개로 구비하는 경우가 많다. 조리용으로는 덜 비싼 EVOO를, 마무리용으로는 수확 시기와 품종이 명시된 프리미엄 EVOO를 따로 쓰는 이중 구조가 스페인 가정에서는 흔한 풍경이다.
이 문화는 한국 식탁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하다. 된장찌개 위에 한 바퀴 두른 EVOO, 두부 구이 마무리에 뿌린 한 줄기 기름은 조리 문화가 달라도 올리브오일의 마무리 역할을 살릴 수 있는 시도로 주목받고 있다.
스페인 소비자들이 EVOO를 고를 때 주목하는 기준은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산도(Acidity)다. 국제올리브협회 기준에 따르면 EVOO는 유리지방산 함량이 0.8% 이하여야 하지만, 스페인의 미식가들 사이에서는 0.2% 미만을 프리미엄의 기준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산도가 낮을수록 올리브 자체의 향미가 잘 보존된 신선한 기름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에서다.
둘째는 수확 시기다. 올리브가 완전히 익기 전인 초록빛 상태에서 수확한 조기 수확(Cosecha Temprana) 기름은 폴리페놀 함량이 높고 쓴맛·매운맛이 강한 특징이 있다. 국제올리브협회 연구에 따르면 폴리페놀은 올리브오일의 산화 안정성에 기여하는 성분으로 보고된 바 있다. 셋째는 품종 단일 표기 여부다. 혼합유보다 단일 품종 기름이 맛의 개성과 추적 가능성 면에서 높이 평가되는 추세다.
스페인 집밥이 지닌 소박한 풍요로움은 결국 재료에 대한 이해와 신뢰에서 온다. 올리브오일 한 병을 선반에 세워두는 것만으로 식탁이 지중해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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